보도자료

[대구 클래식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이야기(상)] “전쟁통에도 클래식 열정, 르네상스 청중 같은 이들은 카네기홀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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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구음협 작성일21-07-12 10:54 조회9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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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에서 필자인 엘킨스가 미군 동료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모습. ‘에튜드’에 실린 사진.

대구음악협회(회장 이치우)가 최근 6·25전쟁 당시 대구 중구 향촌동에 문을 열었던 클래식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대한 기사가 실린 음악잡지 ‘에튜드(Etude)’ 1953년 10월호를 찾아내 확보했다.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음악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어온 만큼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음악잡지는 대구의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콘텐츠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에튜드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2회(상·하)에 걸쳐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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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튜드’에 실린 사진 중 ‘르네상스’에서 음반을 교체하고 있는 박용찬.

박용찬이 향촌동서 문 열어 성업
美음악지‘에튜드’1953년 10월호
대구음악협회 작년 경매로 구입
음악인 사이 회자되던 실체 확인
르포 형식‘코리아…’제목 실려
美병사 음악감상평 생생히 기록
음악아카이브 구축 중요한 성과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미국 음악잡지 ‘에튜드’ 1953년 10월호는 대구음악협회가 지난해 여름 인터넷 경매를 통해 구입함으로써 확보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관련 자료를 탐색하다 다행히 이 잡지를 소유한 사람이 이것을 경매로 내놓은 것을 알게 되고, 경매에 참가해 낙찰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낙찰가격은 30달러 정도. 출간 당시 이 잡지 가격은 40센트였다. 비용은 얼마 들지 않았지만 대구 음악계로서는 희귀하고 소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대구음악협회가 진행하고 있는 대구뮤직아카이브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일이다. 대구뮤직아카이브 사업은 2000년대 후반에 잠시 진행했으나 중단되었고, 2017년 대구음악협회가 최소 3년 계획사업으로 대구시의 지원을 받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에튜드’ 1953년 10월호 16쪽 전면에 ‘코리아 콘체르토’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이 기사는 51쪽으로 이어져 계속된다. 16쪽 기사에는 3개의 관련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르네상스’ 입구 사진과 주인 박용찬씨가 레코드판을 바꾸고 있는 모습, 기사를 쓴 필자인 엘킨스와 동행자들이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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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향촌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에튜드’ 1953년 10월호. <대구음악협회 제공>

‘코리아 콘체르토’ 기사는 6·25전쟁 중 대구에 있었던,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일을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로 보이는 로버트 엘킨스와 게리 제닝스가 쓴 이 기사 내용은 그들이 머물렀던 대구에서 1952년 어느 겨울밤 ‘르네상스’를 찾아 경험한, 놀랍고도 감동적인 클래식 음악 감상과 관련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지난겨울 어느 추운 밤, 우리는 몇몇 다른 미국인과 20여명의 한국인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고 램프가 켜진, 대구의 뒷골목에 숨겨진 가게에 앉아서 전세계적 언어의 리사이틀을 감상했다’고 시작하고 있다.

르포 형식으로 쓴 이 기사 중 ‘음악은 모두 오래되고 긁힌 음반으로 골동품 축음기에 의해 재생되는 레코드(음반)였다. 배가 불룩한 석탄 난로가 방 안의 유일한 난방기였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작은 뒷골목 가게는 모든 남한의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성지가 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르네상스’가 어떤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또 ‘전쟁에 휘말린 곤경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노래의 나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음악에 굶주린 대중에게 자신의 음반을 활용하는 것이 박(Pak)의 바람이었다. 그는 르네상스 다방을 열어 그것을 성취했다. 이제는 음악 애호가, 학생, 작곡가 및 음악가들이 이 소박한 교향악과의 만남(랑데뷰)을 위해 밤이면 모인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쇼팽, 베버, 오펜바흐를 오가는 컬렉션의 범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박용찬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엄청난 컬렉션을 대구로 옮겨와 음악감상실을 연 사실과 그의 클래식음악에 대한 열정과 소망, 전문가적 식견 등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연습곡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튜드’는 1883년 창간되고 1957년까지 발간된 미국의 음악잡지다. 시어도어 프레서(1848~1925)가 미국 버지니아에서 창간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로 치자면 ‘음악춘추’나 ‘음악저널’ 같은 전문 음악 잡지지만, 일반 시민들도 함께 구독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잡지로 보인다. 1953년 10월호를 보면 65쪽 정도의 분량이다.

‘에튜드’를 발행한 시어도어 프레서는 평생 음악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에튜드’ 초판(1883년 10월)은 2천부에 불과했으나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며 1918년 12월엔 정기구독 가입자수가 21만7천800여명에 이르렀고, 1923년에는 직원 수가 341명으로 증가했다. 프레서가 죽은 후에는 1932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음악 교육과 음악 자선활동에 전념하는 프레서 재단이 설립되었다. 

대구음악협회 이치우 회장은 “이 잡지를 찾아 확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다 운 좋게 인터넷을 통해 경매로 올라온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행운이었다. 이를 통해 대구에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녹향’뿐만 아니라 ‘르네상스’가 1952년 성업 중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며 “6·25전쟁 중 대구 중심가인 향촌동에 있던 클래식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는 미국의 음악잡지 ‘에튜드’를 확보한 것은 대구의 음악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고 말했다.

‘코리아 콘체르토’ 기사 전문(번역문)을 소개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르네상스 다방’에 모인 청중만큼 감상을 즐긴 청중은 카네기홀 콘서트에도 없었다”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겨울 어느 추운 밤, 우리는 몇몇 다른 미국인과 20여명의 한국인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고 램프가 켜진, 대구의 뒷골목에 숨겨진 가게에 앉아서 전세계적 언어의 리사이틀을 감상했다. 그날 밤 우리는 리스트의 헝가리언들이 활기차게 마디들을 밟고 지나가는 것을 들었고, 북유럽의 빙산을 산산이 부수는 그리그의 트럼펫 소리를 들었으며, 차이콥스키가 갈대피리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다.

우리의 콘서트홀은 카네기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곳은 평균적인 미국인의 거실보다 작았다. 음악은 모두 오래되고 긁힌 음반으로, 골동품 축음기에 의해 재생되는 음반이었다. 배가 불룩한 석탄 난로가 방 안의 유일한 난방기였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작은 뒷골목 가게는 모든 남한의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성지가 되었다.

이곳은 ‘르네상스 다방’이라는 멋진(용감한) 이름으로 불렸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에서 진지한 음악의 잔재라 할 만한 거의 모든 것이 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이 나라의 클래식 음악에 ‘르네상스’가 온다면, 그것은 대부분 이 다방의 주인인 박용찬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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